강덕원은 6.25동란이 끝난 뒤 어수선하던 시기인 1956년 YMCA권법부에서 수련한 홍정표와 박철희
두 사람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초대 관장은 홍정표가 맡았다.
강덕원이 창설된 근본적인 배경은 YMCA권법부 창설자인 윤병인 관장이 납북된 이후 권법부를
재건하려던 이남석, 김순배와의 갈등으로 파생되었다.
이에 대해 강덕원 2대 관장을 역임한 박철희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조직이 흩어졌을 때 YMCA권법부라는 본 줄기에서 창무관이 먼저 가지를 뻗은 것이고, 그 후 강덕원이 가지를 뻗은 것이기 때문에 엄연히 말해 창무관의 분관이라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1956년 서울 신설동에 도장을 마련한 강덕원은 베풀 '강(講)'에 큰 '덕(德)'자를 떠서
'덕을 가르치는 집'을 표방했다.
강덕원은 50년대 중반에 창설된 신생관(新生館)이어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초창기 관원은 이금홍(현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과 후일 대한태권도협회 5대 회장을 맡아 태권도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김용채를 비롯, 정화, 이정후, 이강희, 한정일, 김병수, 지승원, 임복진 등이었다.
강덕원은 이후 창신동-청진동-서대문-서울운동장-서대문로터리등으로 도장을 옮기다가 이금홍이 3대 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사동으로 이전, 정착하였고 현재 강덕원 무도회(강무회)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무덕관(武德館)은 해방 직후 서울 용산역 부근의 교통부 청사를 빌어 황기(黃琦)에 의해 '운소부우회
당수도부'로 출발했다. 지금의 교통부인 운수부 부설 형식으로 당수도장이 생긴 것이 그 효시지만 청설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946년 이후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무덕관은 용산의 철도국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철도국도장'이라고 칭했다. 당시 수련생은 관번 1번인 김운창을 비롯, 홍종수, 최희석, 휴화영, 남삼현, 김인석, 이복성, 황진태, 원용법, 정창영, 이강익 등으로 이들은 모두 철도국 직원들이었다. 무덕관은 철도국(운수보)을 통해 각 지방의 가차역 창고에 도장을 개관하면서 세력을 넓혀 나가 무덕관 하면 철도역이 연상될 정도였다.
무덕관의 승급심사 때는 청도관 이원국 관장과 송무관 노병직 관장이 왕래하는 등 교분이 두터웠으나
단증 및 급증 발급을 놓고 왕왕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1955년 서울시 중고 동자동 서울역 부근에 무덕관 중앙본관을 신설한 황기는 그 해 전국에 9개의 지관을
신설하고 한중(韓中) 친선 국제 당수도 연무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1960년 무덕관은 큰 변화를 겪었다. 1953년 대한당수도협회(大韓唐手道協會)를 출범한 무덕관이
우리나라 고대 무술이름을 따 대한수박도회(大旱手博道會)로 개칭한 것이다.
그 후 무덕관은 협회 통합에 반대하는 황기의 고집으로 내분이 일어나는 등 소요사태를 겪은 끝에 1965년 3월 김영택과 홍종수가 주축이 되어 황기를 무덕관에서 제명하고 통합의 길을 걸었다. 그 후 이강익이 관장직을 맡았으나 얼마가지 않아 물러났고 뒤이어 홍종수가 관장이 되었으며, 오세준이 그 명맥을 이어갔다. 무덕관은 5대 기간도장 중 관세(館勢)가 가장 컸다.
송무관은 1946년 노병직(盧秉直)에 의해 개성 송악산에서 개관을 하였다. 송무관 창설자 노병직 관장은
청도관 창설자인 이원국과 일분 유학생 시설, 송도관(松濤館)의 후나고시 선생 밑에서 함께 가라데를
배웠다. 해방 직전 고향인 개성에 돌아온 그는 당시 궁사장(활터)이었던 관덕정(觀德停)에서
젊은이들에게 심심풀이 삼아 가라데를 가르친 것이 송무관을 창설한 계기가 되었다.
노병직은 단신의 체구에 강인한 인상이나 지나치게 카리스마가 강해 제자들에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
그는 수련 1시간 전에 일찍 와서 아령과 역기 등으로 몸을 푼 다음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가며 권고대에 정권주먹, 수도치기 순으로 단련을 했는데 그 가공할 완력에 수련생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노관장은 또 수련생들에게 반드시 1백번 이상 권고를 치게 한 다음 본격적으로 지도했는데, 4급이상이면 꼭 실전대련을 시켰다. 또 타 도장과 마찬가지로 추운 겨울에는 모한수련(冒寒修練)을, 더운 여름철엔
모서수련(冒暑修鍊)을 실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송무관은 이회순, 이영섭, 김홍빈, 한상민, 송태학, 이희진, 조규창, 홍영찬, 강원식 등 많은 사람들을
배출했지만 5대 기간도장 중 관세가 가장 미약하였다.
송무관은 초대 관장인 노병직에 이어 2대 이영섭, 3대 강원식 등으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오도관은 군(軍) 장성 출신의 최홍희(崔泓熙)와 남태희(南太熙)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최홍희가 1954년 제3군단에 배속되어 있던 용대리 본부에서 오도관을 창설하기까지는 부관 남태희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에게 남은 '보물급 수하 인물'이었던 것이다.
남태희는 해방 직후 청도관에 입문, 이원국으로부터 당수도를 배운 뒤 1947년 육군통신학교에서 당수도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군과 인연을 맺었다. 미남형의 얼굴에 행정관리 능력이 뛰어났고 당수도 동작이 일품이었던 남은 1953년 제주도 보병 제29사단에 있던 최홍희 장군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오도관에는 남태희를 비롯해 백준기, 한차교, 우종림, 고재천, 김석규, 곽근식 등 청도관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지도사범도 손덕성, 현종명 등 청도관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현종명은 1954년부터 10년간 오도관 수련생들을 지도하며 관장직을 맡기도 했다. 이는 최홍희가 청도관 명예관장으로 재직한 것과
관계가 있다는 후문이다.
오도관은 최홍희가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낸 1955년 기점으로 순풍에 돛단 듯
발전했다. 태권도를 전군(全軍)에 보급시키겠다는 그의 일념으로 당수도장 간판을 태권도장으로 바꾸고
태권도를 수련하는 장병들이 경례를 할 때는 '태권'이란 구호를 외치도록 해다. 특히 월남전쟁으로 1960년대 초부터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된 것을 계기로 오도관은 민간도장과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관세(館勢)를 확장시켜 나갔다.
태권도 교관단 파견은 1962년 12월 남태희를 단장으로 김승규, 정영휘, 추교일 등 4명이 파견된 이래 1973년 3월 12일 철수할 때까지 6백57명의 유단자를 파견했다. 역대 태권도 교관단장은 남태희, 백준기,
최동희, 김석규, 고재천, 김봉식, 정병길, 김승규 등 청도관 출신이 그 축(軸)을 이루었다.
그러나 오도관은 태권도를 수련하고 입대한 사병들의 단(단)증에 청도관 것만 인정하고 나머지 단은
'민간단'이라고 해서 별도로 승단심사를 거치도록 해 민간도장과 첨예한 갈등을 빚었다.
이에 대해 후일 최는 "오도관이 '형제관'이라 할 수 있는 청도관과의 잦은 교류로 기본동작과 형(型·품새) 의 수련체계가 같았으나 지도관, 청무관 등 민간도장의 수련체계와는 달라 군에 맞는 별도의
심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오도관은 최홍희가 국제태권도연맹을 창설한 후 일탈행동을 하면서 급격히 퇴조하게 되는데, 현종명,
곽병오(작고)·백준기 등이 관장직을 맡으며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정도관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정도관 출신인 이용우(현 국기원심사위원)에 의해 서울 서대문
로터리에 중앙본관이 개관되었다. 정도관은 모체관인 청도관과 이렇다 할 마찰 없이 관을 개설했다는게
여느신홍관의 파생과정과 다른 점이다.
당시 정도관의 도장 평수는 1백여평 남짓했는데, 이용우가 다른 도장과 차별화 된 독특한 수련
프로그램으로 지도하면서 소문이 파다했다. 한 때 수련생들이 너무 많이 몰려 5부로
나누어서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나는 떳떳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무도인이다'라는 관훈으로 정도관은 1960년대 중반부터 마산,
울산, 창원, 목포, 김제 등지에 지도관을 개관하며 관세를 확장해 나갔다.
정도관의 초창기 수련생으로는 장용갑, 김재기, 김기동, 오부웅, 주계문, 박태현 등이고 그 뒤를 이어
박경선, 심명구, 김명환, 김학근, 전영근, 전선용, 이종오가 정도관의 명맥을 이어 나갔다.
지도관은 1946년 3월 3일 엘리트 출신의 전상섭에 의해 '조선연무관공수도부'으로 출발하였다.
청소년 시절 유도를 수련했던 전 관장은 일본 유학시절 열심히 가라데를 배웠다. 1943년에 귀국한 그는
서울 소공도에 위치한 유도학교 조선연무관에서 유도와 가라데를 가르치던 중 해방을 맞자 지체 없이
'조선연무관' 간판을 내걸고 관원을 모집하였다.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이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지만 지성인답게 늘 정장차림으로 다녔다.
그러나 6.25동란 때 갑자기 행방불명 되면서 조선연무관은 사실상 해체되고 '지도관'으로 관명을 바꿨다.
해방직후 조선연무관은 무급에서 8급까지 상,중,하로 나눠 관원들을 지도했다.
관번은 입관일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급(級)도 고려하였다.
조선연무관 공수도부는 서울에서 태동했지만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발전은 전북 전주를 중심으로 관세(館勢)를 넓혀나갔다. 당시 진일섬이 1947년 5월 전북 군산에 지관(支館)을 개관한 이래 1955년 전씨 에 의해 전주를 기점으로 군산, 이리, 남원, 정읍 등 군(郡) 소재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조선연무관이 지도관으로 개칭한 것은 한국전쟁 때였다. '지혜로운 길'을 의미하는 지도관은 6.25 동란 때 전상섭이 납북되자 당시 지도사범으로 있던 윤쾌병(尹快炳)이 이종우와 명칭을 바꾸고 1967년까지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지도관은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 통합과정에서 같은 소속인 윤쾌병, 이종우간의 상반된
입장차이로 내홍을 겪기도 했다. 이종우가 이남석, 엄운규, 현종명 등과 협회통합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반면 윤쾌병은 황기와 함께 '종신체 최고 심사위원'을 고집하며 협회 통합 기운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도관 출신으로는 배영기, 이종우, 김복남, 박현정, 이수진, 정진영, 이교윤, 이병로, 홍창진, 박영근 등이 있다. 지도관은 특히 다른 관에 비해 대련을 중시해 태권도 경기화가 이뤄지던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까지 각종 태권도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승완, 조점선, 황대진, 최영렬 등이다.
지도관의 대표적인 분관은 이교윤의 한무관이다. 그러나 이교윤은 한무관의 뿌리는 지도관이 아니라
조선연무관이라고 항변하고 있어 당시 조선연무관이 지도관으로 개칭되는 과정에 정통성시비에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음을 드러냈다.
지도관은 초대관장인 전상섭에 이어 2대 윤쾌병, 3대 이종우 등이 그 명맥을 유지했다.
창무관(彰武館)은 조선연무관에서 전상섭과 함께 무도를 가르치던 윤병인(尹炳仁)에 의해 1946년
서울 종로에 위치한 기독교 청년회관(YMCA)에서 'YMCA권법부' 라는 이름을 창설되었다.
어린 시절을 만주에서 보내면서 중국무술인 '주안파'를 익힌 윤병인 관장은 해방 직전 이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면서 공수도(가라데)를 배워 5단을 인정받았다.
당시 일본대학에는 가라데의 창시자인 '도야마 간켄'이 있었는데 윤병인의 중국 무술을 보고 한눈에
매료됐다고 한다. 그 후 그들은 서로 무술을 교류하면서 우의를 돈독히 다졌다.
그는 무술 성취도가 매우 높아 가라데 5단이 되었고, 일본인을 제치고 일본대학 가라데부 주장을 맡을
정도로 무술의 경지가 높았다. 해방 후 경성농업학교에서 체육교사에 재직하면서 무도를 가르치던
윤병인은 1946년 서울 종로 부근에 권법부를 설치했다.
윤병인은 한마디로 정통 무도인이었다. 체구는 왜소했지만 무도로 단련된 몸은 혈기가 넘쳐났고, 언행은 과묵한 편이었다. 또 멋을 부릴 줄 몰라 신발도 큼지막한 미국 군화를 신고 다녔고, 왼손 손가락이 잘려 나가 더운 여름철에도 항시 흰 장갑을 끼고 다녔다.
당시 그는 자신이 만주를 유랑하면서 섭렵한 무술(주안파 권법)을 제자들의 특성과
체력조건에 맞게 지도했다.
따라서 동문수학한 수련생들도 신체조건과 특성에 맞는 무술을 터득할 수 있었다.
YMCA권법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6년 6월 24일 "연무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박철희는
'작두권'시범을, 박기태는 '봉권'시범을 각각 선보였다. 이 때 청도관의 손덕성, 엄운규, 이용우 등이
찬조시범을 선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YMCA권법부의 수련은 방과 후 오후 4시 30분부터 시작됐다. 초창기 수련생은 광고로 모집해 5백여명이나 됐지만 윤병인이 워낙 엄하고 강도 높게 가르치다 보니 3개월이 지난 후에는 1백80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윤은 6.25동란 때 행방불명되면서 이남석은 체신부에 공수도장을 차려 별도로 수련생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YMCA권법부는 한국전쟁이 끝나자 이남석, 김순배가 주축이 되어 창무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게 된다.
창무관은 영창고등학교의 '창과 무도인'의 '무'자를 합해 명명(命名)한 것으로, 두 마리 용을 상징물로
삼았다. 그러나 이종우 증언에 따르면 창무관 관명(館名)은 .25전에 윤병인이
'애칭'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YMCA권법부 출신으로는 이남석, 김선구, 홍정표, 박철희, 박기태, 김주갑, 송석주, 이주호, 김순배 등이 있다. 한편 2대 관장인 이남석, 3대 관장을 지낸 김순배와 뜻이 맞지 않았던 홍정표, 박철희는 창무관을
떠나 1956년 서울 신설동에 강덕원(講德院)을 개관했다.
해방직후 창설된 5대 기간도장 중 가장 먼저 창설된 당수도 청도관은 글자 그대로 '푸른 파도'를
의미하며 청년 기상과 활동력을 상징으로 삼았다.
청도관 창설자인 이원국(李元國)은 19세 때인 1926년 일본에 건너가 공수도의 본관인 송도관(松濤館·일명 쇼도깡)에 입문, 일본 공수도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후나고시 선생으로부터 가라데를 전수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송무관 창설자인 노병직 관장과 함께 가라데를 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4년 9월 15일 서대문구 옥천동에 있던 영신학교 강당을 빌어 우리나라 최초로
'당수도'라는 이름으로 개관을 하였다.
6.25동란 직후 청도관 관원은 2백명 안팎이었다. 당시 이원국 관장은 일주일에 2번 정도 도장에
들러 수련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때 수련 지도는 유응준과 손덕성(孫德成)이 맡았고,
승급심사는 6개월에 한 번씩 치러졌다.
청도관 출신으로는 유응준, 선덕성, 엄운규, 현종명, 민운식, 한인숙, 정영택, 강서종, 백준기,
우종림, 남태희, 고재천, 곽근식, 김석규, 한차교, 조성일, 이사만, 이준구, 김봉식 등
많은 사람들이 배출되었다.
청도관의 분관(分館)으로는 인천을 중심으로 한 강서종의 국무관(國武館), 서울 서대문구 이용우의
정도관(正道館), 광주 고재천의 청룡관(靑龍館)과 최홍희의 오도관(吾道館) 등이 있다. 특히 오도관은 한국전쟁 후 군에 입대한 청도관 출신들의 인물들이 주로 활동했다. 청도관은 제1대 초대 관장인
이원국에 이어 2대 관장은 손덕성, 3대는 엄운규로 이어졌다. 손덕성이 청도관 관장직을
맡았을 때는 한구건쟁 당시 일본에 밀항한 이원국의 관장 임명장을 놓고 엄운규,
현종명, 남태희 등과 갈등을 빚었다.
1956년 8월 이교윤 관장이 창설한 한무관은 50년대 중반부터 생기기 시작한 신생관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도 이교윤은 한무관이 지도관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말을 반복했다. 조선연무관 관장이었던 전상섭이 한국전쟁 때 납북된 후 조직체계가 흐트러지면서 이종우가 지도관을, 자신이 한무관을 개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무관의 뿌리는 지도관이 아니라 조선 연무관이라는게 이교윤의 주장이다.
당시 한국체육관은 권투, 유도, 레슬링, 역도, 펜싱 등을 가르치는 종합체육관이었다.
이상묵의 허락을 얻어 한국체육관에서 임시방편으로 태권도(당수도)를 가르친 이교윤은 1년만에 2백명
이상의 수련생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종우와의 갈등이 증폭되자 이상묵의 제의로 당분간
태권도 지도를 중지한 이교윤은 그 후로 서울 종로구 창신동 강문고등학교 뒤편 공터에 한무관 간판을
내걸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것이 한무관이 생기게 된 발단이다.
창신동 시절은 고생길이었다. 도장이라곤 하지만 천막을 치고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고 수련하는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관세(館勢)가 날로 커져 1969년에는 꿈에 그리던 어엿한 중앙도장을
서울 왕십리에 마련할 수 있었다.
본내용은 "태권도 현대사(강원식,이경명)"
"사진으로 보는 태권도사(강신철)" 근간으로 하여 구성되었습니다.
[월드베스트태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