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발생기(원시시대~부족국가시대)
우리 나라는 전통적인 농경사회로서 신 안은 천신, 태양신을 숭상하고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이 마음속 깊이 내재되어 있어 정 신적 지주로서 떠받들어졌다. 원시사회에서의 모든 생활은 천 신을 위해서 행해지고, 이것은 곧 존재를 위해서 행해지는 본능적인 행위로써 받아들여졌다. 원시사회에서의 태권도는 천 신을 위한 행위로서 자기자신이 어떠한 위험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며, 인간이 손과 발을 사용하여 동물의 공격을 흉내내는 형태로 하던 것이 시간이 흘러 체계적인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2.제 1 발전기(고대국가초기~중기까지)
제 1 발전기는 우리 나라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이 시기에 고구려 태조 왕 때부터 실시되어지는 '선배제도'는 차대 왕, 소수림왕에 걸치면서 군사제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으며, 청소년 교육이념으로 송경습사의 정신과 상무정신을 중심으로 문무를 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무를 숭상하는 정책으로 일관되어 왔다.
그러한 정책은 광개토왕에 의해서 만주를 걸쳐 중원 진출을 꾀하게 하였다. 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는 전성기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으며 신라에 선배제도를 전하여 화랑도 조직 을 완성하게 하였다. 신라의 화랑도는 고구려의 선배제도의 행정적 체계와 상무정신, 그리고 가야의 싸우라비 정신을 도입하여 신라 본연의 전통 사상과 씨족사회 때부터 계속되어 온 원 화 제도의 문제점을 극소화하기 위해서 원 화 제도를 화랑도제도로 재편성하였다. 화랑도 제 도는 신라가 삼국 중에서 가장 후진적이던 면을 극복하고 새로운 강국으로 발전하는데 원동력이 되었으며,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이상의 발전기의 기간 중에서 겨루기의 역사적인 근거를 찾아보자.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서 '선배제도'에 관한 기록을 보면...
"고구려 태조 왕 때에 선배가 중심이 되어 매년 3월 10일 신수 두 경기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태껸이 시합되었다."
-무용총의 고분벽화를 보면....
"무용총의 현실과 주실 천 정에 두 무사가 겨루기를 하려는 찰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 고분의 그림을 보면 현대 태권도의 겨루기와 형태가 유사하게 나타나 있다.
-황해도 동수묘 고분의 전실 동 벽에 보면...
"동수묘이 전실 동 벽에는 두 무사가 겨루기를 하는 것이 그려져 있다." 이 고분의 벽화도 현대 태권도 겨루기와 유사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일본서기
"백제사람 대좌 평과 지석 등을 초대하여 일본의 건아들과 함께 상 박을 하였다."
이상의 문헌과 유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권도의 겨루기는 태권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실정인 바, 여기에서의 겨루기 역사는 정신적, 사상적 측면을 제외하고 실제적인 경쟁수단으로서 태권도를 중심으로 고찰하여 본 것이다.
3.제 1 전성기(고대국가 중기~말기까지)
태권도의 제 1 전성기는 고대삼국시대 중에서 각 나라마다 영토를 확장하는 단계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태권도의 제1전성기는 태권도의 최고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이것은 고대 전쟁의 성격이 현대전과는 달리 백병전의 성격이 짙어서 체력과 무술의 정도에 따라서, 가장 중요한 호국정신과 청장년들의 마음자세 등이 좌우한다고 할 수 있었다.
고대전쟁에서의 무술은 군사력과 비례하며, 여기에서 무술은 상대방을 이기지 못하면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상황이므로, 한치의 오차도, 한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드시 상대방보다 뛰어난 무예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살펴볼 때 우리의 고대 태권도는 광개토왕이 중원으로 진출을 꾀하고 요동을 차지할 수 있었던 저력으로 나타났으며, 수나라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여 살수에서 수장시켰던 을지문덕 장군의 기개와 지혜 그리고 고구려 군사들의 용기와 무예의 근본이 되었으며, 또 당 태종의 30만 대군을 슬기롭게 막아냈던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용맹과 기개를 기르는데 그 기본이 되었다.
이상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우리의 고대 태권도는 중국의 무술에 비교하여 우월했다고 생각되며, 불교도입 이후 중국의 권법이 전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위의 사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근거 없는 억측으로 추론할 수 있으며 고대 태권도가 어떠한 기구를 사용하는 무술 이전에 기초단계로서 필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또 경쟁수단으로도 직접 사용하였다. 또 화랑도들이 수련했던 무술이 태껸과 수박이었다는 점을 미루어보아 태권도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다 .
4. 정체 기(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 무신 란 이전까지)
태권도가 정체현상을 나타내는 시기는 삼국통일과 대 당 외교로 평화적인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무예의 필요성이 줄어들어 청년 조직인 화랑도가 유명무실해지면서 기술적인 발전이나 행정적인 발전이 완전히 정체형태로 나타난다.
태권도가 정체기로 들어서면서 새로운 시도로 방향전환을 꾀했는데, 이것은 그 동안 사상적, 정신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던 호국불교에서 자기수양을 위한 선종으로 바뀌면서 태권도의 성격도 수련을 통하여 인격적인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선 무도 적인 성격으로 바뀌어졌다. 그래서 이 시기의 태권도는 질적인 발전은 있으나 행정적, 제도적 발전은 완전히 정체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중심의 무도에서 점차적으로 일반서민 중심의 무도로서의 오락적인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 시기의 태권도는 대체적으로 정체하였으나 오락적인 측면에서 시범을 위한, 또는 군사훈련 수단으로 부분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문헌에 나타난 태권도는 고려사 권36 충혜왕조 후 3년 5월, 후 4년 2월, 6월 "임금이 당춘정에 납시어 수박희를 보았다." "임금이 화비관에서 수박희를 보셨다."
여기에서 수박희를 보았다는 말은 원시적인 형태의 SPORTS 태권도로 위력과 겨루기를 보았다는 뜻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상에서와 같이 통일신라와 고려의 태권도는 질적인 발전은 있었으나, 전반적인 측면에서 정체 기임을 부정할 수 없다.
5. 침체기(고려 무신 란 이후~조선시대를 걸쳐 한일합방까지)
고려말부터 태권도는 계속된 정체 현상에서 비롯된 상황으로 말미암아 침체기에 들어선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지배층에서의 문무대립은 무신을 천시하게 되어서 자연적으로 무예의 침체가 가속화되었다. 고려말부터 불교의 위치가 흔들리고 유교가 치국의 도로서 받아들여짐에 따라서 선무도로 발달했던 태권도는 마침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불교가 완전히 억불정책에 의하여 산중불교가 되면서 선무도로서 태권도는 일반 서민 사회의 태권도와 격리되면서 성격이 다른 무도로 전해내려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대에 이르러서는 불교 무도와 우리의 태권도가 근원이 다른 것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으며, 불교무도의 뿌리를 중국의 권법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태권도 역사의 연구과정에서 강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조선시대 태권도는 군대에서 일반사병을 뽑는데 만 사용되었으며, 무를 천시한 양반사회와는 완전히 격리되고 또 시대가 태평하다보니 무의 필요는 더욱 더 무시되어 침체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이런 시절에도 태권도에 대한 흔적은 남아 있다.
세조실록 권 9, 3년 9월
"단양의 향리, 관리 등이 나라에서 수박희로 시합을 벌여서 잘하는 자를 군사로 뽑는 다는 말을 듣고 서로 다투어 수박희를 하려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권34 풍속 편
"백중날이면 전라도와 충청도의 접경 사람들이 수박희를 겨루는 시합이 있었다."
이상의 역사적인 실증은 침체기에 있었던 태권도의 명맥을 이어오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태권도 역사를 요약해 보면...
1단계 : 생존수단을 위한 태권도(원시사회)
2단계 : 전쟁수단으로서의 태권도 (고대국가 이후~중세, 근세까지)
3단계 : 오락 화된 태권도 (고려시대~근대까지)
4단계 : 선무도 적인 태권도 (통일신라 이후 ~ 현재의 불교무술)
5단계 : 현재 Sports 태권도 (1960년대 이후 ~ 현재)
6. 혼란기(1945년 해방~1965년 태권도 협회 구성)
8.15해방이후 각종 서구문화의 무질서한 도입으로 정치적인 혼란과 더불어 현재 태권도는 커다란 변신을 꾀하고 있었다. 이 것은 민족 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사라져가던 전통무도에 일제 때 도입되었던 가라데의 행정적인 제도와 지도방법이 유입되는 과정으로 시행착오를 계속하는 기간으로 혼란기라 부르고 있다. 이시기는 겨루기에 대한 움직임이 거의 없었던 시기이다.
7. 제 2발전기(1965년~1973년 WTF 협회구성)
1962년 현대 Sports로서 경기 화된 태권도가 시도된 이후, 태수도 협회에서 대한체육회에 정식 가맹되었다. 그후 태수도는 태권도로 개칭되어 지금까지 단일행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2세대 지도자들에 의해서 경기화가 강력하게 추진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월남파병과 미군의 한국주둔이 계기가 되어 태권도 국제화가 시도되기 시작되었으며, 1966년 최홍희가 중심이 되어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국제 태권도연맹(International Tae Kwon Do Federation)을 결성하였다. 그후 최홍희는 정권에서 소외되어 말레이지아 대사로 나가 있다가 캐나다로 정치적 망명을 하여 ITF를 이끌고 있다.
한편, 협회장에 선출된 김운용 박사는 1972년 11월 국기원을 준공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국기로서 채택이 되었고, 19 73년 세계태권도 연맹(The World Tae Kwon Do Federation)을 결성하여 동년 5월 국기원에서 세계선수권대회를 열었다.
이후 1974년 아시아선수권,1976년 유럽선수권과 중동선수권,1978 년 범미주대회,1979년 아프리카선수권 등 수 많은 대회가 창설되어 유치되고 있다.
8. 제 2전성기(1973년 이후)
태권도는 손과 발을 사용하는 세계 어느 나라의 무도보다도 월등한 기술과 실용성, 그리고 행정체제로 세계적인 Sports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1975년 WTF(세계 태권도 연맹),
GAISF(국제경기연맹연합회)의 정식 가맹단체 승인
1976년 CISM(국제군인체육회)정식종목 채택
1980년 World Game 정식종목 채택
WTF의 IOC승인단체로 임명
1983년 Pan American Games Programs정식종목 채택
1984년 9월 아시안 Games정식종목 채택(아시아 올림픽평의회)
이상과 같은 급속한 발전은 1988년 서울올림픽의 시범종목에 채택되었다.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 나라는 전통적인 농경사회로서 신 안은 천신, 태양신을 숭상하고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이 마음속 깊이 내재되어 있어 정 신적 지주로서 떠받들어졌다. 원시사회에서의 모든 생활은 천 신을 위해서 행해지고, 이것은 곧 존재를 위해서 행해지는 본능적인 행위로써 받아들여졌다. 원시사회에서의 태권도는 천 신을 위한 행위로서 자기자신이 어떠한 위험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며, 인간이 손과 발을 사용하여 동물의 공격을 흉내내는 형태로 하던 것이 시간이 흘러 체계적인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2.제 1 발전기(고대국가초기~중기까지)
제 1 발전기는 우리 나라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이 시기에 고구려 태조 왕 때부터 실시되어지는 '선배제도'는 차대 왕, 소수림왕에 걸치면서 군사제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으며, 청소년 교육이념으로 송경습사의 정신과 상무정신을 중심으로 문무를 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무를 숭상하는 정책으로 일관되어 왔다.
그러한 정책은 광개토왕에 의해서 만주를 걸쳐 중원 진출을 꾀하게 하였다. 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는 전성기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으며 신라에 선배제도를 전하여 화랑도 조직 을 완성하게 하였다. 신라의 화랑도는 고구려의 선배제도의 행정적 체계와 상무정신, 그리고 가야의 싸우라비 정신을 도입하여 신라 본연의 전통 사상과 씨족사회 때부터 계속되어 온 원 화 제도의 문제점을 극소화하기 위해서 원 화 제도를 화랑도제도로 재편성하였다. 화랑도 제 도는 신라가 삼국 중에서 가장 후진적이던 면을 극복하고 새로운 강국으로 발전하는데 원동력이 되었으며,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이상의 발전기의 기간 중에서 겨루기의 역사적인 근거를 찾아보자.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서 '선배제도'에 관한 기록을 보면...
"고구려 태조 왕 때에 선배가 중심이 되어 매년 3월 10일 신수 두 경기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태껸이 시합되었다."
-무용총의 고분벽화를 보면....
"무용총의 현실과 주실 천 정에 두 무사가 겨루기를 하려는 찰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 고분의 그림을 보면 현대 태권도의 겨루기와 형태가 유사하게 나타나 있다.
-황해도 동수묘 고분의 전실 동 벽에 보면...
"동수묘이 전실 동 벽에는 두 무사가 겨루기를 하는 것이 그려져 있다." 이 고분의 벽화도 현대 태권도 겨루기와 유사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일본서기
"백제사람 대좌 평과 지석 등을 초대하여 일본의 건아들과 함께 상 박을 하였다."
이상의 문헌과 유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권도의 겨루기는 태권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실정인 바, 여기에서의 겨루기 역사는 정신적, 사상적 측면을 제외하고 실제적인 경쟁수단으로서 태권도를 중심으로 고찰하여 본 것이다.
3.제 1 전성기(고대국가 중기~말기까지)
태권도의 제 1 전성기는 고대삼국시대 중에서 각 나라마다 영토를 확장하는 단계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태권도의 제1전성기는 태권도의 최고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이것은 고대 전쟁의 성격이 현대전과는 달리 백병전의 성격이 짙어서 체력과 무술의 정도에 따라서, 가장 중요한 호국정신과 청장년들의 마음자세 등이 좌우한다고 할 수 있었다.
고대전쟁에서의 무술은 군사력과 비례하며, 여기에서 무술은 상대방을 이기지 못하면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상황이므로, 한치의 오차도, 한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드시 상대방보다 뛰어난 무예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살펴볼 때 우리의 고대 태권도는 광개토왕이 중원으로 진출을 꾀하고 요동을 차지할 수 있었던 저력으로 나타났으며, 수나라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여 살수에서 수장시켰던 을지문덕 장군의 기개와 지혜 그리고 고구려 군사들의 용기와 무예의 근본이 되었으며, 또 당 태종의 30만 대군을 슬기롭게 막아냈던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용맹과 기개를 기르는데 그 기본이 되었다.
이상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우리의 고대 태권도는 중국의 무술에 비교하여 우월했다고 생각되며, 불교도입 이후 중국의 권법이 전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위의 사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근거 없는 억측으로 추론할 수 있으며 고대 태권도가 어떠한 기구를 사용하는 무술 이전에 기초단계로서 필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또 경쟁수단으로도 직접 사용하였다. 또 화랑도들이 수련했던 무술이 태껸과 수박이었다는 점을 미루어보아 태권도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다 .
4. 정체 기(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 무신 란 이전까지)
태권도가 정체현상을 나타내는 시기는 삼국통일과 대 당 외교로 평화적인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무예의 필요성이 줄어들어 청년 조직인 화랑도가 유명무실해지면서 기술적인 발전이나 행정적인 발전이 완전히 정체형태로 나타난다.
태권도가 정체기로 들어서면서 새로운 시도로 방향전환을 꾀했는데, 이것은 그 동안 사상적, 정신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던 호국불교에서 자기수양을 위한 선종으로 바뀌면서 태권도의 성격도 수련을 통하여 인격적인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선 무도 적인 성격으로 바뀌어졌다. 그래서 이 시기의 태권도는 질적인 발전은 있으나 행정적, 제도적 발전은 완전히 정체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중심의 무도에서 점차적으로 일반서민 중심의 무도로서의 오락적인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 시기의 태권도는 대체적으로 정체하였으나 오락적인 측면에서 시범을 위한, 또는 군사훈련 수단으로 부분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문헌에 나타난 태권도는 고려사 권36 충혜왕조 후 3년 5월, 후 4년 2월, 6월 "임금이 당춘정에 납시어 수박희를 보았다." "임금이 화비관에서 수박희를 보셨다."
여기에서 수박희를 보았다는 말은 원시적인 형태의 SPORTS 태권도로 위력과 겨루기를 보았다는 뜻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상에서와 같이 통일신라와 고려의 태권도는 질적인 발전은 있었으나, 전반적인 측면에서 정체 기임을 부정할 수 없다.
5. 침체기(고려 무신 란 이후~조선시대를 걸쳐 한일합방까지)
고려말부터 태권도는 계속된 정체 현상에서 비롯된 상황으로 말미암아 침체기에 들어선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지배층에서의 문무대립은 무신을 천시하게 되어서 자연적으로 무예의 침체가 가속화되었다. 고려말부터 불교의 위치가 흔들리고 유교가 치국의 도로서 받아들여짐에 따라서 선무도로 발달했던 태권도는 마침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불교가 완전히 억불정책에 의하여 산중불교가 되면서 선무도로서 태권도는 일반 서민 사회의 태권도와 격리되면서 성격이 다른 무도로 전해내려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대에 이르러서는 불교 무도와 우리의 태권도가 근원이 다른 것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으며, 불교무도의 뿌리를 중국의 권법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태권도 역사의 연구과정에서 강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조선시대 태권도는 군대에서 일반사병을 뽑는데 만 사용되었으며, 무를 천시한 양반사회와는 완전히 격리되고 또 시대가 태평하다보니 무의 필요는 더욱 더 무시되어 침체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이런 시절에도 태권도에 대한 흔적은 남아 있다.
세조실록 권 9, 3년 9월
"단양의 향리, 관리 등이 나라에서 수박희로 시합을 벌여서 잘하는 자를 군사로 뽑는 다는 말을 듣고 서로 다투어 수박희를 하려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권34 풍속 편
"백중날이면 전라도와 충청도의 접경 사람들이 수박희를 겨루는 시합이 있었다."
이상의 역사적인 실증은 침체기에 있었던 태권도의 명맥을 이어오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태권도 역사를 요약해 보면...
1단계 : 생존수단을 위한 태권도(원시사회)
2단계 : 전쟁수단으로서의 태권도 (고대국가 이후~중세, 근세까지)
3단계 : 오락 화된 태권도 (고려시대~근대까지)
4단계 : 선무도 적인 태권도 (통일신라 이후 ~ 현재의 불교무술)
5단계 : 현재 Sports 태권도 (1960년대 이후 ~ 현재)
6. 혼란기(1945년 해방~1965년 태권도 협회 구성)
8.15해방이후 각종 서구문화의 무질서한 도입으로 정치적인 혼란과 더불어 현재 태권도는 커다란 변신을 꾀하고 있었다. 이 것은 민족 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사라져가던 전통무도에 일제 때 도입되었던 가라데의 행정적인 제도와 지도방법이 유입되는 과정으로 시행착오를 계속하는 기간으로 혼란기라 부르고 있다. 이시기는 겨루기에 대한 움직임이 거의 없었던 시기이다.
7. 제 2발전기(1965년~1973년 WTF 협회구성)
1962년 현대 Sports로서 경기 화된 태권도가 시도된 이후, 태수도 협회에서 대한체육회에 정식 가맹되었다. 그후 태수도는 태권도로 개칭되어 지금까지 단일행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2세대 지도자들에 의해서 경기화가 강력하게 추진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월남파병과 미군의 한국주둔이 계기가 되어 태권도 국제화가 시도되기 시작되었으며, 1966년 최홍희가 중심이 되어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국제 태권도연맹(International Tae Kwon Do Federation)을 결성하였다. 그후 최홍희는 정권에서 소외되어 말레이지아 대사로 나가 있다가 캐나다로 정치적 망명을 하여 ITF를 이끌고 있다.
한편, 협회장에 선출된 김운용 박사는 1972년 11월 국기원을 준공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국기로서 채택이 되었고, 19 73년 세계태권도 연맹(The World Tae Kwon Do Federation)을 결성하여 동년 5월 국기원에서 세계선수권대회를 열었다.
이후 1974년 아시아선수권,1976년 유럽선수권과 중동선수권,1978 년 범미주대회,1979년 아프리카선수권 등 수 많은 대회가 창설되어 유치되고 있다.
8. 제 2전성기(1973년 이후)
태권도는 손과 발을 사용하는 세계 어느 나라의 무도보다도 월등한 기술과 실용성, 그리고 행정체제로 세계적인 Sports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1975년 WTF(세계 태권도 연맹),
GAISF(국제경기연맹연합회)의 정식 가맹단체 승인
1976년 CISM(국제군인체육회)정식종목 채택
1980년 World Game 정식종목 채택
WTF의 IOC승인단체로 임명
1983년 Pan American Games Programs정식종목 채택
1984년 9월 아시안 Games정식종목 채택(아시아 올림픽평의회)
이상과 같은 급속한 발전은 1988년 서울올림픽의 시범종목에 채택되었다. 오늘에 이르렀다.